배삼식의 희곡 '1945'는 1945년 만주국의 수도 신징에서 해방을 맞은 조선인들을 조명한다. 며칠 전까지 일본인 학교를 다닌 11살 숙이와 9살 철이 남매는 갑자기 일본어를 쓰면 안 된다는 엄마의 윽박지름에 당황한다. 엄마가 없을 때 몰래 일본어로 대화하기도 한다. 해방의 의미를 모르는 아이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를 사용할 뿐이다.
일제 강점기 숙이와 철이가 일본어에 더 익숙했던 것은 일제의 동화 정책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동화는 식민 지배 관계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일본계 미국인이자 게이이고 뉴욕대학교 로스쿨 교수인 켄지 요시노의 '커버링'(민음사 발행)은 약자와 소수자가 자기 정체성을 숨기고 다수에 동화되는 것을 커버링이라고 명명한다. 요시노에게 커버링은 주류에 부합하도록 남들이 선호하지 않는 정체성의 표현을 자제하는 것이다. 그는 이성애자인 척해야 했고, 커밍아웃한 후에도 게이라는 것을 드러내면 안 됐다. 미국인이지만 미국인이 아닐 것이라는 시선 앞에서 미국인답게 행동해야 했고, 교수가 되었을 때는 퀴어와 섹슈얼리티에 관한 연구가 아니라 ‘보편적인’ 헌법학을 다루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았다. 물론 마거릿 대처가 발성 코치에게 목소리 음색을 낮추는 훈련을 받아서 여성성을 제거하거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휠체어를 책상 뒤에 숨겨서 장애를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다수자’들도 커버링을 한다. 그러나 약자와 소수자들에게 커버링은 의무가 된다.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에게 일본어가 의무인 것처럼 말이다. …(이하 생략)…
출처: 허윤. "내 본연의 모습대로 살지 않아야 한다는 요구에 대하여," 한국일보(202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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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삼식의 희곡 '1945'는 1945년 만주국의 수도 신징에서 해방을 맞은 조선인들을 조명한다. 며칠 전까지 일본인 학교를 다닌 11살 숙이와 9살 철이 남매는 갑자기 일본어를 쓰면 안 된다는 엄마의 윽박지름에 당황한다. 엄마가 없을 때 몰래 일본어로 대화하기도 한다. 해방의 의미를 모르는 아이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를 사용할 뿐이다.
일제 강점기 숙이와 철이가 일본어에 더 익숙했던 것은 일제의 동화 정책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동화는 식민 지배 관계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일본계 미국인이자 게이이고 뉴욕대학교 로스쿨 교수인 켄지 요시노의 '커버링'(민음사 발행)은 약자와 소수자가 자기 정체성을 숨기고 다수에 동화되는 것을 커버링이라고 명명한다. 요시노에게 커버링은 주류에 부합하도록 남들이 선호하지 않는 정체성의 표현을 자제하는 것이다. 그는 이성애자인 척해야 했고, 커밍아웃한 후에도 게이라는 것을 드러내면 안 됐다. 미국인이지만 미국인이 아닐 것이라는 시선 앞에서 미국인답게 행동해야 했고, 교수가 되었을 때는 퀴어와 섹슈얼리티에 관한 연구가 아니라 ‘보편적인’ 헌법학을 다루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았다. 물론 마거릿 대처가 발성 코치에게 목소리 음색을 낮추는 훈련을 받아서 여성성을 제거하거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휠체어를 책상 뒤에 숨겨서 장애를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다수자’들도 커버링을 한다. 그러나 약자와 소수자들에게 커버링은 의무가 된다.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에게 일본어가 의무인 것처럼 말이다. …(이하 생략)…
출처: 허윤. "내 본연의 모습대로 살지 않아야 한다는 요구에 대하여," 한국일보(202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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