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논평][한국일보] "무지의 권력, 몰랐다는 변명은 그만"

FIPS 허윤

폭력의 위협이 지속되면 폭력을 포착하는 감각이 극도로 발달한다. 위협을 감지하기 위해 사람들의 어조를 살피고 얼굴 표정과 몸짓을 읽는 데 능해진다. 학대하는 사람의 요구와 그의 화를 유발하는 지점을 직관적으로 인지하고 그에 따라 행동을 조절한다. '가난 사파리'(돌베개 발행)의 저자 대런 맥가비는 어머니와 공동체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과잉각성 상태에 놓였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한다. 일상적 폭력에 노출된 사람은 폭력을 인지하는 법을 본능적으로 체득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모른다'는 권력이다. 폭력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강화길의 소설집 '화이트 호스'에 수록된 소설 '음복'은 그늘이 없는 미소를 가진 남자와 결혼한 여자의 시점에서 제사 풍경을 담아낸다. 세나는 남편 정우의 미소가 마음에 들어 결혼을 결심한다. 그는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조부모도, 늘 어머니와 세나에게 시비를 거는 고모의 행동도 감지하지 못한다. "애는 언제 낳을 거냐"라며 예의 없는 질문을 던지는 고모를 "진중하고 속이 깊으신 분"으로 묘사했을 정도다. 정우의 미소는 무지의 권력에서부터 나온 것이었다. 정우에게 그 권력을 준 것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가족 내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면서 가부장제를 지탱한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였던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는 날,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제발 꺼지라고"를 외치며 상을 엎는다. 상에는 할아버지가 생전에 좋아하던 토마토 고기찜이 놓여 있다. 전쟁에서 돌아온 후, 평범한 식사를 거부한 그는 "아내가 만들 수 없는 음식, 먹고 싶지 않은 음식, 함께 먹을 수 없는 음식"만을 요구했다. 할아버지의 요구에 맞춰 토마토 고기찜을 개발한 것은 며느리인 정우의 어머니였다. 그는 아들 정우가 아무것도 모른 채 할아버지와 토마토 고기찜을 좋아할 수 있도록 한다. 이 '모름'은 세나가 자신의 어머니와 외삼촌의 갈등을 지켜보았던 경험과 비교된다. 세나는 외삼촌을 편애해서 어머니를 울렸던 외할머니를 생각하며 외사촌과의 우애를 거절했다. 딸은 눈치챘지만, 아들은 몰랐다. 몰라야 했다. 세나는 조용히 되뇐다. "너는 아무것도 모를 거야." …(이하 생략)…


출처: 허윤. "무지의 권력, 몰랐다는 변명은 그만," 한국일보(202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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