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세미나 후기][소그룹세미나] 종간정의, 젠더, 동물-시즌 1 (4/14)

관리자

달연 (동물해방공동체 직접행동 DxE 활동가)

동물 노동‘이라는 제목은 동물의 처참한 착취와 죽음이 만연한 이 시대 얼마나 문제적이고 그렇기에 매력적인 질문들을 생산해낼 수 있는가. 저자들은 다양하게 실패하고 또 시도한다. 그리고 이 책을 대결적으로 읽고자 이 세미나에 모인 우리들은 한 문장 한 문장 구체적인 얼굴들을 불러내가며 이 ’동물노동‘이 어떻게 무의미해지거나 유의미해질 수 있었는지 따져가며 분노하는 시간을 가진다.

‘노동함’으로서 비인간동물이 성원권을 가진다는 말은 ‘노동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성원권마저 빼앗는다. 책을 소환한 우리는 책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고 세미나를 시작한다. 비인간동물이 ‘노동’ 혹은 ‘착취’되고 있는, 혹은 ‘존재하고 있는’ 현실마저 가시화되지 않은 사회에서 ‘동물노동’을 이야기함으로서 이들에게 동료 노동자라는 지위를 거머쥐게 할 수 있다는 의견은 효과적인 것처럼 들린다. 성노동자권리운동 담론을 따라오고 살펴온 이력이 있는 개인으로서, 그 자리에 ‘비인간동물’을 넣고 있는 이 담론이 아주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라고만 느껴지지는 않았다.(사실은 아직 마음 한켠에, 여전히 ‘동물노동’으로 펼칠 수 있는, 보다 더 좋은 방향이 있을 수 있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몇 저자들이 처참히 실패했을 뿐.) 그렇게 ‘동물노동’으로 동물들을 위한 더 나은 삶과 공존이 가능하다는 저자들의 이론을 샅샅이 살피는 몇 주차의 과정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애정하는 노련한 세미나 구성원 동료들은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진다. 그들을 여전히 노동의 영역에 남겨두었을 때 권력 관계가 사라질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노동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는가? 그 ‘노동’ 이란 순전히 인간을 위한 활동이 아닌가? 인간도 하기 싫은 노동을 굳이 비인간동물에게 시키려는 의도가 무엇인가?

이번 세미나에서는 첫 번째로 마르크스의 인본주의적인 소외 이론을 동물노동을 연관 지어보는 챕터를 함께 읽었다. 유적 자질 역시 순수하게 인간만의 활동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사회기관이 이종 간의 관계를 통해 구축돼 온 역사적, 사회적 과정의 산물로 생각할 때 소외이론을 동물로 확장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시선이 흥미로웠다. 다만 ‘좋은 노동’, 괜찮은 일자리‘ 라는 언급에 가지게 되는 거부감 또한 나누었다. 본디 ’노동‘ 이 어떻게 착취가 아닐 수 있는가. 여기서의 ’좋은 노동‘ 이라는 것은 ‘고귀하고 존엄한’, 정상적이고 능력 있는 존재가 할 수 있는 일만을 지칭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이 장을 발제한 림보는 ‘그림자 노동’을 이야기하며, 가려진 노동담론. 소외 없는 노동이라는 이상은 그동안 비가시화된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자는 것이기보다는 계속 보이지 않게 하자는 암묵적 합의처럼 느껴진다는 의견을 말해주었다. (우리는 노동이 너무 하기 싫고, 밥을 벌어먹기 위한 수단이자 사회구조에서는 착취로 느껴지는데, 이 저자들에게 일은 너무 행복한 자기 실현이고 즐거운 것이어서 동물들도 꼭 했으면 좋겠는 건가..? 라는 도균의 말이 큰 공감이 되었다.)

두 번째로 다룬 챕터는 ‘농업예외주의‘였다. 여기서 말하는 농업은 축산업을 포함하는데, 법적 보호 책임에서 농장/축산업동물,노동자가 예외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즉 보호의 테두리 바깥에서 밀려나게 되는 것. 그러나 정작 기업들은 면죄부가 주어지게 되는 지점을 짚어낸 파트였다. 농업예외주의는 농업시설에 한해 ‘오염’ 책임을 면제하는 나라들이 사유재산인 땅에 허가를 내리고 환경보호 행위에서 면죄부를 내리게 한다. 이는 유해조수’‘살처분’으로 낙인찍힌 동물들과, ‘법적 보호종’, ‘멸종보호종’으로 규정되어진 종들 간의 차별을 명확하게 한다. 외에도 축산업 관련 노동자, 특히 이주민노동자와 축산동물들을 대립/소외되게 만드는 구조를 기획하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주제였다. 이 챕터에서 저자 제시카 아이젠은 ‘동물노동’이라는 언어가 ‘동물 농업의 극단적인 조건을 일반화’하고 ‘현재의 동물 이용형태를 합리화 하’는 낭만화를 가져오며 산업 전반의 현상을 가져오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지점을 상기하게 했다. 동물-노동이라는 이름만으로 과연 혁신적으로 동물들의 현실을 바뀌게 될 수 있을 것인지 새롭게 질문하게 했다. 노동인권, 흑인인권투쟁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가정하는데는 오류가 있으며, 마찬가지로 동물이 노동자로 인정된다면 반드시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상정하는데도 무리가 있다는 점을 짚는 것이 중요했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환경에서 노동하게 된 동물과의 공존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단순히 인간이 ‘동물의 노동이 없는 삶을 상상하지 못해서’ 만들어낸 상상력의 한계가 아닌가?

이 날 살펴본 마지막 챕터 동물노동의 의미에서는 동물복지 축산의 옹호자 조슬린 포처의 말을 반박하는 드롱의 글을 읽고 이야기 나누었다. 이 챕터에서 동물노동이라는 이론이 동물복지의 방향을 강고히 하기 위해 쓰이기 얼마나 효과적인지 느낄 수 있었다. ‘동물노동’이라는 언어는 동물들의 해방과 그들 존재로서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확실한 한계를 보이는 듯 했다. (사실 내용이 더 많았는데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동물 복지,동물 노동. 즉 여전히 동물이 인간을 위해 이용되되 다만 더 나은 조건에서 일하게 되는 상황까지 밖에 상상하지 못하게 된 인간들이다. 동물노동이라는 책을 가지고 이어나가는 우리 세미나는 언제나 ‘동물해방’이 온 세상에 대한 상상에 대한 너무나 막연하지만 포기할 수 없기에 구체적이려 노력하는 각자의 아이디어가 반짝인다. 어쩌면 이제 너무 동물에 의존해버려서, ‘동물을 이용하지 않는 삶’을 상상할 수 없게 된 인간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진정한 동물해방이 무엇이라고 감히 제시하는 것도 오만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이런 인간들이 자본주의와 구조적 착취에서 해방되어 에밀리가 말한 ‘지구적 가축화’에서 벗어나 인간해방을 이루는 것과도 응당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