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논평][탐방기] 냉전의 인질로 붙들린 사람들의 이야기 2

FIPS 심아정


스탈린의 비밀지령, 전후 복구의 비계(scaffold)가 된 포로들

 

그의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일을 겪었던 것일까? 일본은 승산 없는 전쟁을 끌어오다가 1944년엔 급기야 식민지 조선에까지 징병제를 실시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종전을 불과 며칠 남겨두고 징집되어 온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문순남은 1923년 생으로, 종전 두 달 전에 징집되어 만주로 끌려갔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일주일 앞둔 1945년 8월 8일, 줄곧 관망하는 입장을 견지해왔던 소련은 일본에 대해 갑자기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에 주둔하고 있었던 일본의 관동군을 침공한다. 당시 관동군 정예부대의 대부분이 태평양 전선에 투입된 상태였기 때문에, 만주에 남아있던 전력은 군수물자와 인력면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일본은 전쟁 말기에 만주와 조선 각지에서 조선인 청년들을 급조하는 방식으로 징집을 실시하여 만주의 관동군에 그들을 배치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소련 정부는 경제 부흥과 도시 재건을 위한 노동력으로 일본군 포로들을 활용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1945년 8월 23일에 소련 국가방위위원회의 결정(No.9898)으로 불리는 ‘스탈린 비밀지령’이 내려지자, 일본군 포로들은 그해 9월부터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몽골로 이송되어 강제노동으로 내몰리게 된다. 포로들은 전후 소련과 몽골의 재건을 위한 비숙련 노동력으로 투입되었다. 건물이 준공되면 인부들의 발판이나 지지대와 같은 비계가 철거되듯이, 물질적 토대를 구축한 포로들은 이후의 소련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적 사회적 활동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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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스탈린 비밀지령극비문서 No.9898   우: 시베리아 포로수용소에서 촬영된 사진(1990년대 부산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송광호기자 제공)>

 

관동군 소속 조선인들은 일본군으로 간주되었다. 소련 각지로 끌려간 일본군 포로는 64만 명을 웃돌았고, 2000여개의 포로수용소에 흩어져 수감되었는데, 이 중 조선인은 1만 여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일본 국적과 창씨개명된 일본 이름으로 포로명부에 기록된 채 소련군에 넘겨졌기 때문에 아직도 정확한 파악이 어렵다고 한다. ‘일본군’으로 뭉뚱그려진 사람들 속에는 조선인뿐 아니라 중국인, 만주인, 몽골인, 심지어 말레이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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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유너머104  http://www.nomadist.org/s104/G3_Webzine_review_phil/31735

『문학3 (제2호)』(창비,2017)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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