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연합으로서 대안 교육을 생각하다 / 올튼

2021-10-29


대안학교에서 근무 하다보면 대안교육이 무엇일까 고민이 들 때가 참 많다. 예전에 택시를 탔을 때 대안학교에 일한다고 하자 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택시 기사님이 "힘든 학생들을 위해서 일하는 좋은 선생님"이라고 "칭찬"을 해서 당황했었던 적이 있다. 기사님의 "칭찬"이 대안교육에 대한 한국사회의 전반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에서 1990년대 제도권 교육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등장한 대안교육은 "학교 부적응" 학생을 위한 교육으로 "오해"를 받을 때가 많았다. 지금도 대안학교 설립 계획이 알려질 때 마다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설립이 무산되거나 인적이 드문 곳으로 쫓겨가다시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앞서 말한 택시 기사님의 "칭찬"에 대해서 어떤 반응이 적절한 대답이었을까? 대안교육은 단지 학교에 부적응하는 학생들이 오는 학교가 아니라 교육다운 교육을 실천하고자 하는 곳이라고 "해명"이나 "반박"을 하면 될까? 대안교육은 제도권 교육의 보완재 역할이 아니라 선도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설명하면 될까?


이러한 대답 역시 "부적응" 학생과 "일반" 학생을 이원화하는 질문의 전제를 허물기보다는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헤게모니 담론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교육 담론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대안교육이라 한다면 "부적응" 이야말로 변화를 갈망하는 행위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정치적 덕성이다. 대안교육을 만들어 가는 주체 역시 대안학교에만 국한되기보다는 더 큰 담론 연합(discourse coalition)으로 이해될 때 더욱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담론 연합은 네덜란드 정치학자 하야(Hajer)가 유럽의 생태적 근대화 (ecological modernization)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해 낸 개념이다. 담론 연합적 접근에 따르면 정치적 연합을 가능케 해주는 조건은 동일한 이해관계나, 정체성, 신념이 아니라 압축적인 서사인 스토리라인에 있다. 유럽의 죽어가는 숲과 하천들이 단지 자연재해가 아니라 산업 공해가 유발한 산성비 때문이라는 일련의 스토리라인은 환경에 관한 복잡다단한 과학적 논리와 담론들을 넘어서서 다양한 행위자들이 환경 문제를 공통의 문제로 인식(정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스토리라인을 기반으로 구성된 담론 연합의 행위자들은 말 그대로 담론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지 이들 간에 물리적인 연대활동이나 상호 이해관계가 꼭 전제될 필요는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떻게 문제를 정의하는지다. 


담론 연합적 접근으로 대안교육을 바라본다면 대안학교뿐만 아니라 설사 본인이 대안교육을 한다고 의식하지 않지만 새로운 교육 담론을 만들어 내는 수많은 행위자 역시 담론 연합의 주요한 행위자일 수 있다. 대안교육을 대안학교에서 수행되는 교육적 실천을 넘어서 하나의 담론 연합으로 이해할 때 다양한 신념과 이해관계, 정체성을 지닌 행위자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교육에 관한 역동적인 담론을 포착할 수 있다. 아래 열거된 예시와 같이 다종다양한 곳에서 이질적 주체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새로운 교육 담론을 만들어 가고 있다.


 각 지역에서 인권 친화적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 학생인권조례 제정과 청소년에 대한 근대적 규범에 균열을 내기 위해 힘써온 청소년 운동 단체, 스쿨 미투 운동을 통해 학내 성차별과 성추행을 폭로 해온 청소년 활동가들, 성소수자 청소년이 학교 안팎에서 겪은 차별과 폭력 문제를 가시화환 성소수자 인권 단체, 기존 비장애인 중심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성교육의 한계를 폭로하고 성과 장애와 교차적 관점에서 성교육 프로그램을 기획, 준비, 실행해온 장애여성 단체, 장애 청소년에게 법적으로 열려있으니 실질적으로 닫혀있는 교문과 교실 문을 열어젖히면 통합적 교육환경을 주장해온 학부모들, 초등학교에서부터 페미니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실천해온 교사들, 학내에서 퀴어문화축제를 준비하는 학생들, 포괄적 성교육 기본법 제정을 위해 릴레이 시위를 하는 단체들, 페미니스트 페다고지를 실천하고자 했던 교육자이자 연구자들, 분단 체제와 평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탈분단 평화교육의 실천과 담론을 만들어 온 교육 단체, 생태적 실천을 학교의 중요한 교육과정으로 만들어온 학생들, 기획 기사 등을 통해 학교 안팎에서 청소년이 겪는 다양한 차별과 폭력을 가시화하는 언론, 정기적으로 잡지를 발간하면서 새로운 교육 아젠다를 발굴하는 출판사 등등. 이렇듯 대안교육 담론 연합을 이루는 행위자들은 학교 테두리 안에 국한되지 않으며, 청소년 운동, 장애여성 운동, 퀴어 운동, 페미니즘 등 여러 운동 영역에서 기존의 지배적 교육 담론에 균열을 내고 있다. 하야는 다양한 주장이 서로 다른 기원에도 불구하고 현상을 해석하는 방식을 공유하는 상황을 담론적 친화성(discursive affinity)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위에 언급된 각기 다른 운동의 주장들 역시 포커스와 뿌리가 다르더라도 기존 교육 현상에 내재한 다양한 억압 구조와 권력의 층위를 폭로하고 있다는 점에서 담론적 친화성을 지니고 있다.    


대안교육 담론 연합의 행위자는 사회운동 단체에 한정되지 않는다. 제도적 권위를 지닌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역시 정책 결정, 집행, 해석 영역에서 새로운 교육담론을 (재)생산하고 있다. 지역 의회 상임위나 본회의에서 청소년 성소수자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옹호하는 정치인, 학내 혐오 표현을 금지한 학생인권조례에 대해서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한 헌법 재판소, 수업 시간에 반동성애 발언을 한 교사에 대해 학내 사과를 요구한 학생인권교육센터의 인권 옹호관 등등이 그러하다. 또한 한국에 포괄적 성교육을 촉구한 유엔아동권리위원회 같은 국제 행위자가 생산하는 담론 역시 국내 행위자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주요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대안교육을 자신의 정체성과 지향점의 맨 앞에 두고 있지 않더라도 대안적 교육 담론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 위에서 언급된 단체나 행위자 모두 대안교육 담론 연합을 생성, 유지, 확대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하야(Hajer)가 지적했듯이 담론 연합의 행위자는 모순적인 발화를 통해서 다른 담론 연합의 유지와 확대에 기여할 수 있다. 교육 담론 연합의 행위자의 저항적 위치는 고정되기 보다는 가변적이며 행위자의 발화에 따라 얼마든지 헤게모니 담론의 공모자가 될 수 있다. 기존 담론이 지닌 전제에 대해 질문을 충분히 던지지 않았거나, 기존 규범을 담론적 기회구조(discursive opportunity structure)로 삼기 위해 전략적으로 (혹은 자기 검열적으로) 전복적 주장의 수위를 조절하는 과정에서도 지배 담론을 재생산할 수 있다. 인권 친화적 학교에 대해서 강조하면서도 기존 보호주의적 아동관과 청소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성평등 교육을 이야기하면서도 성별 이분법에 갇혀 있거나, 더불어 사는 삶을 교육 철학의 중심에 두면서도 여전히 독립성과 의존성에 대한 위계화된 이원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좋은 학교 만들기를 주장하면서도 교육=학교, 청소년=학생이란 근대적 등식을 재생산하는 교육실천  등등이 그러하다. 지배적 담론과 불화하는 것 동시에 기존의 헤게모니 담론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대안교육 역시 헤게모니 담론에 대한 저항성과 공모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롬바르도 (Lombardo), 마이어 (Meier), 베를루 (Verloo)가 성평등이라는 개념이 유럽 내 정책과정에서 어떻게 늘어나고(stretching), 구부러지고(bending), (임시적으로 나마) 고정화(fixing) 되었는지 설명 하였는데 대안교육의 의미 역시 새로운 담론의 등장에 따라 확장되고, 구부러지면서 이전과 다르게 정의될 수 있다. 기존 대안교육에서 강조해 온 자발성과 협력, 공생, 인권 친화적 학교, 민주 시민성 개념들은 담론 투쟁의 장에서 끊임없이 확장하고 변화한다. 학교 안팎을 가로질러, 그리고 공식적 교육과정과 비공식적 교육과정을 가로질러 기존 개념을 새롭게 쓰는 작업이 오늘도 대안교육을 만들어 가고 있다. 무엇을 교란하고 무엇과 공모 하는지, 무엇을 새롭게 구성하고 무엇을 영속시키는지에 대한 성찰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발명"하려는 노력이야 말로 대안교육이라는 담론연합을 지속 가능케 하는 조건이 아닐까? 그것을 위해서는 가장 필요한 태도는 바로 기존 제도에 대한 부적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