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공공성을 찾아서 / 문아영

2021-08-20


정치로서의 거짓말, 정치로서의 혐오


코로나19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인지 2차 대유행을 앞둔 고요인지 알 수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발병의 원인도, 예방법도, 치료법도,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은 이 전염병 앞에서 우리는 종종 쉬운 선택을 하게 된다. 이 불확실한 현실을 수용하기 보다는 당장 원망할 수 있는 손쉬운 표적을 상정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21대 총선을 앞둔 선거운동 과정에서 미래통합당의 황교안 전 대표는 코로나19라는 공식명칭이 아닌, ‘우한 코로나’라는 명칭을 고수했다. 조선일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출처: <미디어오늘> 2020.02.25 "미래통합당은 ‘우한 코로나19’로 부른다" (사진: 금준경 기자)


‘눈에 보이는 손 쉬운 적’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공공연한 거짓말에 불려오는 단골손님이다. ‘우한’이라는 특정한 지역을 반복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얻고자 했던 반사이익은 중국인을 코로나19의 원인으로 지목함으로써 중국인 입국을 전면 금지하지 않은 현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고 이를 통해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려는 것이었을 텐데, 현실은 그 의도를 비껴갔다.

미래통합당, 조선일보와 같은 노선을 채택한 이들이 또 있다. 미국의 트럼프와 공화당은 코로나19를 ‘중국 바이러스’라 부르기를 서슴지 않으며 현 상황에 대한 대응보다는 11월 예정된 대선에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정치인들뿐일까?

일상 속에서 우리는 만연한 거짓말과 더불어 살아간다. 코로나19의 대유행이 시작되고 아시아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인종차별과 혐오에 직면했다. 마스크를 썼다는 이유로, 또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폭행당하는 사례들이 빈번히 보도되었다. 일부 몰지각한 서구사람들만의 일이 아니다. 한국은 그러한 인종차별과 혐오로부터 자유로운가? 천만의 말씀이다. 서구 사회의 아시아인 혐오는 국경을 넘으며 중국인과 조선족이라 불리는 재중동포에 대한 한국인들의 차별로 그 옷을 갈아입는다.

이러한 차별은 때때로 매우 노골적이다. 한국 정부가 마스크 수급량 조절을 위해 실시한 공적마스크 구매제도에서 주민등록번호를 가지지 않은 이들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국민과 비국민의 경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는 재난기본소득이 지급되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다. 태어난 나라가 달라서 배제되고, 외모의 생김이 달라서 차별받는 경험은 인종차별철폐협약이 만들어진 지 55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은밀한 모습으로 일상에 숨어있다가 코로나19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면 다시 그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차별과 배제를 동원한 정치가 비판받는 것은 그 위해가 ‘사람’을 향할 때뿐이다. 더 노골적인 차별과 배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21세기는 완벽히 인간중심으로 설계되었고 운영되어 왔다. ‘우리’가 ‘우리’를 설정해 온 이 방식은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수많은 존재들의 고통을 기만해 왔다. 이러한 인간 중심 사회에서 ‘사람이 아닌 동물’의 고통에 관련한 사실들은 고의적 누락되어 온 것이다.


코로나19 이후의 뉴노멀, 불편한 사실을 마주하기


뉴노멀(New Normal)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문자 그대로 새로운 기준, 새로운 표준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경제용어로 시작되어 분야를 넘나들며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것(New)’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직면해야 하는 일상적인 거짓말들이 있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획 속에서 일상화되어 알아차리기조차 힘든 거짓말들. 맛있는 우유라는 거짓말, 아름다운 마블링이라는 거짓말, 신선한 계란이라는 거짓말.

맛있는 우유는 쉼 없이 임신해야 하는 소의 고통과 출산 직후 버려지는 송아지의 죽음이다. 아름다운 마블링은 근육이 생기지 못하도록 갇혀 있는, 더 예쁜 마블링을 위해 동물성 사료를 먹어야 하는 또 다른 소의 고통이다. 신선한 계란은 도살장에 가는 트럭 안에서도 산란하는 닭의 고통이다.

인간에게 사육되기 전의 닭은 한 달에 하나의 알만 낳았다는 것을 아는가? 매일 산란하는 닭의 고통에 기대어 맛있는 계란프라이가 ‘우리’의 식탁에 오른다. 젖소라는 이름은 또한 얼마나 인간중심적인가? 인간중심의 사회는 비인간동물의 고통에 지겹도록 기생해 왔다. 맛있는 식사를 위해 외면해 왔던 이 사실들은 매우 정치적으로 구성된 거짓말이다.

생태학자들과 활동가들은 인간이 자연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접촉하지 않았어도 될 바이러스와 만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19는 인간 중심 사회가 자초한 일이다. 이를 피하고 싶다면 ‘우리’와 함께 지금-여기에 존재하지만 단 한 번도 ‘우리’안으로 초대된 적 없는 존재들을 ‘우리’로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코로나19 이후, 그저 정보기술 의존도가 조금 더 높아진 삶 정도를 뉴노멀로 상상한다면 우리의 뉴노멀은 그저 새로운 전염병과 더불어 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공화국(共和國)이라 불러왔던 것의 위기는 여기에 있다. ‘공(共)’을 어떻게 설정하는가.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만들고 기술의 진보를 영위할 수 있는 인류는 다른 어떤 동식물보다 위대한 존재라는 과잉 자의식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결국 그 민주주의는 생태계의 아주 지극히 작은 일부일 뿐이며 그 생태계가 없다면 민주주의도 없다. 따라서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급한 과제는 “새로운 우리 (New-We)”를 설정하는 것이다. 지구는 모두의 것이고 그 모두는 ‘인간’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아영 (피스모모 대표)

평화교육 단체 (사)피스모모를 2012년 9월 동료들과 함께 창립하였다. 피스모모의 슬로건은 "평화는 모두의 것 (Peace as Commons)"이며 “모두가 모두로부터 배운다”를 핵심 가치로 평화와 배움, 평화와 일상을 연결하는 플랫폼이 되고자 한다. 실천적 사유에 관심이 많으며, 한나 아렌트를 좋아하고, 북한산이 보이는 집에서 새촘, 우아, 레오, 라라, 네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있다.